영웅전설 시리즈를 통해 바라본 팔콤의 이모저모(제목수정)

최근에 추억 삼아서 틈틈이 영웅전설 시리즈를 하얀 마녀~벽의 궤적까지 순차적으로 클리어했다. 엔딩을 보고 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확실히 가가브 트릴로지와 궤적 시리즈는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가가브 시리즈가 단절된 세계관에서 한 편의 게임마다 완결된 스토리를 통해 전체의 모습을 조망하는 단편집이라면, 궤적 시리즈는 거대한 장편 서사시를 보는 느낌이랄까.(문제는 전자의 단편집의 단편 하나도 규모만 보면 어지간한 장편 하나에 버금간다는 사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비유다.) 그래서 도스 시절의 영웅전설에 더 아기자기함을 느끼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고, 감정적으로 더 몰입하게 되는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건 내가 하얀마녀를 먼저 플레이해서 생긴 선점효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규모가 어떻게 되었든 영웅전설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서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팔콤은 철저하게 '인간 개인의 가치'를 강조하는 입장을 견지했다는 사실이다. 영웅전설은 알다시피 소년소녀들이 작은 계기를 통해 세계를 여행하고, 보고 겪으면서 결과적으로 세상을 구하게 된다는 내용....이라 말하지만 사실 제로의 궤적&벽의 궤적에서 이 플롯은 깨진다. 그리고 천공의궤적 SC에서부터 전조는 있었다. 다만 주인공들은 분명히 자신들이 대면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자신들의 노력을 다하고, 그런 "작은 움직임들이 모여서 결국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거대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팔콤 게임은 작은 노력들이 모임으로써 인간 세계가 이상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신념, 사람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보여준다.

자,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이 어째서 팔콤의 정치적 성향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팔콤은 세계를 구성하는 개인들 각자가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반드시 이에 대한 안티테제를 설정하고 있다. 다만 드래곤 슬레이어 시리즈는 나도 이제 잘 기억이 안 나니 넘어가고(..) 가가브 트릴로지에선 아직 명확한 형태로 반대입장이 제시된 것은 아니다. 정치 얘기를 하려면 국가체제를 언급 안 할수가 없는데, 아직 국가라는 소재 자체가 이야기 진행에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었으니까. 가가브 시리즈에서의 위기상황은 '피할 수 없는 한쪽 세계의 멸망'인데, 주인공의 반대입장이라 함은 이 위기를 어떻게 폭탄돌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다만 여기선 팔콤의 균형잡힌 시각을 파악할 수 있는데, 하얀 마녀는 어느 누구도 자신이 과거에 행한 일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러면서도 이를 어떻게 극복할지는 그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의 의지에 달려있음을 말한다. 주홍 물방울에선 종교라는 소재를 통해 세상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둥지를 떠날 때가 왔다는 묘사를 통해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리고 베리어스-어빈 일행의 갈등에서 궤적 시리즈 주제의식의 편린을 어렴풋이 볼 수도 있다. 이건 궤적 시리즈 말할 때 같이 언급. 바다의 함가는..내가 보기엔 3-4 스토리적으로 연결하는 팬서비스니까(..) 넘어가자.

실질적으로 '팔콤의 정치성향으로서의 안티테제'을 논할 수 있는 건 궤적 시리즈이다. 여기서 언급할 것은 하늘의 궤적 FC, SC와 벽의 궤적이다. 하늘의 궤적 FC의 위기상황은 "자신의 나라가 양 강대국에 의해 위협받는 상황"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적대세력인 리샬은 고대유물의 힘으로 강력한 군사국가를 건설하려 하였다. SC에서는 직접적으로는 리벨 왕국의 위기지만, 와이스맨이 이러한 위기를 만든 동기는 "가만히 내버려두면 언젠가 타락하고 쇠퇴할 인간문명"이고, 이를 와이스맨은 인간이 '감정에서 완전히 해방된 초인'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벽의 궤적의 경우, "온전한 국가가 아닌 '자치주'로서 국제사회에서, 또한 국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는 현실"을 디타 크로이스가 키아라는 인과율마저 뒤바꾸는 강력한 지보의 힘을 통해 역으로 크로스벨이 종주국이 되어 세계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으며, 이는 작중의 묘사에 따르면 권력욕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 나름대로의 '정의'를 실현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의도는 필연적으로 국가 혹은 집단의 개인들에게 부당한 위해를 가하게 되며, 게임의 주인공들은 이들의 문제의식 자체에는 공감하면서도 그것을 "물리적인 힘"으로, 타의에 의해 극복되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해결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 자체로서 문제상황이 지속되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실제로 게임 안에서의 스토리는 그대로 흘러간다. 그리고 적대세력들의 행보는 인간의 삶의 의지를, 작디 작은 인간이 인생을 통해 얻는 가치들을,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것임을 역설한다.

잘 보면, 리샬과 디타의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한 방법론은 '부국강병'의 사상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와이스맨은 조금 입장이 다르나, 개인의 감정 자체가 개인이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근거임을 고려한다면 사회를 전체로서의 시스템으로서만 가치를 부여하는 전체주의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니까, 팔콤은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해 극도로 경계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전체보다 개개인의 삶을 중시한다는 의미에서 팔콤은 (세계 일반적인 기준에서) 좌파다. SC에서 아군인 올리비에가 제국주의적인 발상과 행동력으로 무장한 재상에게 대항하기로 한 이유를 생각해보자. 그는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또한 "사람은, 나라는,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긍지를 갖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개인적으로는 이 파트를 궤적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좋아한다.) 여기서 아까 가가브 시리즈를 언급할 때 말했던 인간관이 다시 고개를 든다. 나의 나라, 그리고 세계 모든 나라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삶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그 사실을 알리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면, 인간의 자긍심을 지키는 방식으로 그 세력에 저항하겠다는 것이 저 주장의 핵심이다. 거대한 불가역적인 힘을 배척하고 개인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점에서 주홍 물방울의 신에 대한 의지vs인간으로서의 위기상황 극복의 의지 구도와 많이 비슷하지 않나?

(여담이지만 솔직히 한국사회의 현실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촌철살인의 한 마디가 아닐 수 없다. 진영을 막론하고 근거없는 비난과 조롱, 최소한의 이치에 벗어난 행동 어디에도 긍지는 찾아볼 수 없으니...)
(위의 올리비에 장면은 http://www.youtube.com/watch?v=rN4CaSz8LHg 참조. 일본어.)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풀어 말하자면, 궤적 시리즈의 핵심은 보다 큰 목적(=부국강병)이 있다는 명분 아래 인간을 억압해선 안된다는,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팔콤의 정치이념은 '자유쥬의'다. 사실 이건 하늘의 궤적 무대배경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건데, 이야기의 배경 국가 이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리벨 왕국'이다. 작중 묘사에 따르면 100년 전에 신분제가 폐지되고 입헌 군주국이 된 것으로 보인다. 자, 주목할 곳은 리벨의 스펠링이다. 지도에 영문표기를 보면 liber로 표기한다. 라틴어로 '책'이란 뜻이 있지만, 여기서 따 온것 같지는 않다. 영어로 비슷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나? statue of liberty가 뭐더라? 추측의 영역이지만, 하늘의 궤적은 무대에서부터 팔콤의 인간의 자유에 대한 신념을 피력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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